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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팬이라면 꼭 알아야 할 사샤 (등장, K리그, 인간성)

by 뮤즈크롬의 티스토리 2025.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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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샤 트라쿨리치 선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K리그를 뜨겁게 달군 이름, 바로 사샤 드라쿨리치입니다. 세르비아 출신의 이 스트라이커는 단순한 외국인 용병을 넘어, K리그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득점왕이자 우승 청부사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부산, 수원, 성남을 거치며 수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고, 지금도 K리그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으로 회자됩니다.

K리그를 뒤흔든 외국인 스트라이커, 사샤의 등장과 성공

사샤 드라쿨리치는 1972년 8월 28일, 유고슬라비아의 빈코브치에서 태어났습니다. 190cm의 장신에 강한 체격을 가진 그는 스트라이커로서 타고난 골 결정력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그의 축구 인생은 유럽의 명문 구단인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에서 시작되었지만, 당시 팀 내 경쟁이 치열해 주로 리저브 팀에서 활동했습니다.그러던 중 1995년, K리그의 부산 대우 로얄즈가 그를 영입하면서 한국 무대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당시 외국인 선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던 시기였지만, 사샤는 첫 시즌부터 8골을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K리그 데뷔골은 1995년 6월 21일, 일화 천마와의 경기에서 터졌습니다. 이후 1998년까지 부산에서 활약하며 정규리그 57경기 16골을 기록했고, 1997년에는 마니치와 함께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팀의 리그 우승과 리그컵 2관왕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 사샤는 단순한 외국인 용병이 아닌, 팀의 핵심 공격수로 자리매김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98년 7월, 그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게 됩니다. 수원에서의 첫 시즌, 사샤는 18경기에서 8골을 기록하며 팀의 K리그 우승에 기여합니다. 그리고 1999년, 그는 26경기 18골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K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킵니다. 이 시즌은 사샤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논란도 있었습니다.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 부산 대우 로얄즈를 상대로 신의 손 사건이라 불리는 논란의 골을 기록하며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MVP를 수상하지 못하고 안정환에게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팬들에게는 사샤의 존재감을 더욱 강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샤는 수원에서의 활약을 통해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골을 넣는 선수 그 이상으로, 팀의 분위기를 바꾸고 승리를 이끌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전형적인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스피드나 기술보다는 골 결정력과 위치 선정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필리포 인자기를 연상시키는 그의 움직임은 K리그 수비수들에게는 악몽이었고, 팬들에게는 환희였습니다.

이후 그는 잠시 J리그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지만, 부상과 적응 문제로 인해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다시 수원으로 임대 복귀합니다. 이 시기에도 그는 팀에 기여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결국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게 됩니다. 이 결정은 그의 커리어에 또 다른 전환점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샤 드라쿨리치는 K리그에서의 첫 발부터 수원에서의 전성기까지, 외국인 선수로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용병이 아니라, K리그의 일부였고, 한국 축구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이름입니다. 그의 등장과 성공은 K리그가 외국인 선수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성남에서의 전성기와 전설적인 기록

2000년, 사샤 드라쿨리치는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며 또 한 번의 축구 인생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당시 성남은 리그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추진하고 있었고, 사샤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성남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계약금만 15억 6천만 원을 투자했고,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평가했지만, 사샤는 성남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진가를 증명합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성남은 K리그 3연패를 달성하며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이 기간 동안 사샤는 정규리그 90경기에서 27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2002년 3월 17일, 부천 SK와의 경기에서는 한 경기 5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는 K리그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골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그의 골 결정력과 집중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성남에서의 사샤는 단순한 스트라이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감독이었던 故 차경복 감독은 그의 활동량이 줄어든 것을 고려해,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만 움직이며 골을 노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사샤는 골 넣는 기계라는 별명을 얻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움직임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치밀한 계산과 탁월한 위치 선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샤는 성남에서 데니스, 김도훈, 신태용 등과 함께 뛰며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데니스와는 서로 게으름을 부리려 했지만, 주장 신태용의 존재로 인해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팀 내에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면서도, 경기에서는 냉정하고 치명적인 골잡이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성남 시절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는 성남의 리그 3연패를 이끌며 팀의 역사에 깊이 새겨졌고, 팬들에게는 영원한 레전드로 남았습니다. K리그 통산 271경기 104골 37도움이라는 기록은 그가 얼마나 꾸준하고 강력한 공격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전체 K리그 선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치이며, 외국인 선수로서는 독보적인 성과입니다.

또한 그는 K리그에서 최다 해트트릭(6회), 한 경기 최다 골(5골) 등의 기록도 보유하고 있으며, 수원과 성남에서 각각 리그 우승 2회, 3회를 달성하며 총 6회의 K리그 우승을 경험한 선수입니다. 이러한 성과는 그가 단순한 골잡이를 넘어, 팀의 승리를 이끄는 리더였음을 보여줍니다.

성남에서의 사샤는 단순한 외국인 용병이 아닌, 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팬들과 교감하며 팀의 문화에 녹아들었고, 성남의 황금기를 함께 만든 주역이었습니다. 그의 전성기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K리그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모와 팬과의 교감

1999년,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이 한창이던 시기, 사샤는 경기 중 결승골을 넣은 뒤 카메라를 향해 NATO, Stop Assail이라고 적힌 언더셔츠를 보여주며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축구장에서 보기 드문 정치적 발언이었기에 큰 화제가 되었고, 많은 한국 팬들도 그의 고국을 향한 애정과 진심 어린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사샤가 단지 골을 넣는 선수 그 이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줬습니다.

그 외에도 사샤는 귀화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약하고 한국 문화를 존중하던 그는 귀화에 대한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팬들과의 교감은 더욱 깊어졌고, 그는 진정한 K리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대중 매체에서도 사샤는 여러 번 주목받았습니다. 특히 2013년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배우 한고은이 사샤와의 친분을 언급해 다시 한번 이슈가 되었으며, 그가 한국에 남긴 인연들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과 한국 생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인터뷰 등을 통해 인간적인 모습으로 팬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사샤는 선수 시절 동안 수많은 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경기장에서의 활약은 물론, 팬 사인회, 인터뷰, 사회 봉사 활동 등을 통해 진심을 담은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수원과 성남, 부산 등 그가 거친 도시에서 그의 이름은 단순한 외국인 선수의 이름이 아닌, 지역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기억됩니다.

이러한 교감은 단지 감정적 연결을 넘어, 리그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샤는 외국인 선수들이 K리그에 제대로 녹아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고, 이후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K리그에 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팬들과 소통하려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데얀, 몰리나, 마그노, 네게바 등 그 뒤를 이은 수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사샤의 발자취를 따랐고, K리그는 점점 더 국제적이며 다양한 색을 가진 리그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샤 드라쿨리치는 그래서 단순한 축구 선수가 아닙니다. 그는 역사, 문화, 인간성을 함께 짊어진 상징적인 인물이며, 그의 존재는 지금도 K리그 팬들에게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스포츠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감정과 교감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 바로 사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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