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시절의 성장과 활약
하석주(河錫舟)는 1968년 2월 20일,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하며 선수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벽돌공장 비닐하우스 한 켠에서 공을 차며 꿈을 키웠고, 육상으로 다져진 스피드를 바탕으로 축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학창 시절은 서울숭곡초등학교, 경신중학교,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를 거쳐 아주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하며 엘리트 축구 코스를 밟았다. 아주대 축구부는 당시 국내 대학 축구계에서 손꼽히는 명문이었고, 하석주는 그 중심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키가 작아 고민이 많았지만, 고3 때 무려 20cm가 자라며 신체 조건까지 갖추게 되었고, 대학 시절에는 프로팀의 해외 전지훈련에 동행할 정도로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그는 1990년, K리그의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데뷔 첫 해부터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MVP와 득점왕을 동시에 수상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 1991년 K리그 우승, 1997년 삼관왕(리그,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 등 팀의 황금기를 이끄는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1. 특히 1997년에는 K리그 통산 16번째로 20-20 클럽에 가입하며 공격력과 활동량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하석주의 별명은 ‘왼발의 달인’이었다. 그의 왼발 킥은 프리킥, 코너킥, 중거리 슛 등 다양한 상황에서 위협적인 무기가 되었고, 정확성과 예리함을 겸비한 킥 능력은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포지션은 윙어, 윙백, 미드필더까지 다양하게 소화했으며, 특히 왼쪽 측면에서의 돌파와 크로스는 상대 수비를 흔드는 강력한 무기였다.
1998년, 그는 일본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했지만, 시즌 중 연봉 협상이 결렬되며 실전 출전은 거의 없었다. 이후 같은 해 김도훈이 활약 중이던 비셀 고베로 이적했고, 이곳에서 본격적인 J리그 커리어를 시작했다. 비셀 고베에서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총 65경기에 출전해 11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1999 시즌에는 29경기 7골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김도훈, 최성용과 함께 팀을 중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비셀 고베에서의 활약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일본 무대에서 한국 선수의 경쟁력을 증명한 사례로 남았다. 당시 J리그는 기술 중심의 축구를 지향했는데, 하석주는 빠른 침투와 강력한 킥으로 그 흐름에 적응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2000년 시즌 종료 후 팀과 재계약이 이뤄지지 않으며 일본 무대를 떠나게 되었고, 2001년 포항 스틸러스로 복귀해 K리그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2003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선수 시절 동안 K리그 297경기 50골, 국가대표 A매치 94경기 23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하석주의 선수 생활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향해 달려갔고, 국내외 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대한민국 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프랑스 월드컵, 천국과 지옥을 오간 90분
1998년 6월, 프랑스 월드컵은 하석주 선수에게 있어 축구 인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가장 깊은 상처로 남은 무대였다. 대한민국은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함께 E조에 속해 있었고, 국민들은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기대하며 대표팀에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당시 대표팀은 차범근 감독이 이끌었고, 하석주는 왼쪽 측면 수비수로 주전 자리를 꿰차며 출전 준비를 마쳤다.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였다. 경기 초반부터 한국은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고, 전반 28분, 하석주의 왼발에서 역사적인 골이 터졌다. 약 30미터 거리에서 얻은 프리킥 찬스에서 그는 직접 슈팅을 시도했고, 공은 수비벽에 맞고 굴절되어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골은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선제골로 기록되었고, 하석주는 그 순간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단 2분 뒤, 멕시코의 라몬 라미레즈에게 백태클을 시도한 하석주는 주심으로부터 레드카드를 받으며 퇴장당했다. 당시 FIFA는 선수 보호를 위해 백태클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었고, 하석주는 그 규정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라커룸에서 홀로 경기를 지켜보며 죄책감에 시달렸고, 후반전 동안 세 번의 함성이 들릴 때마다 한국이 골을 넣었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1-3 역전패였다.
이 퇴장은 단순한 경기 결과 이상의 충격을 안겼다. 하석주는 이후 네덜란드전에서 벤치에도 앉지 못했고, 관중석에서 황선홍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며 0-5 참패를 목격했다. 차범근 감독은 결국 경질되었고, 하석주는 자신이 감독의 경질에 영향을 미쳤다는 죄책감을 오랫동안 안고 살았다.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에서는 징계가 한 경기로 감면되어 출전할 수 있었고, 그는 유상철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1-1 무승부를 이끌었다. 이 경기는 그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무대였고, 국민들도 그를 다시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귀국 후 그는 사인 요청을 받으며 용서를 받았다고 느꼈고, 이후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 월드컵은 하석주에게 있어 축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겸손과 책임감을 배웠고, 지도자로서 후배들에게 백태클의 위험성과 냉정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월드컵은 단순한 국제 대회가 아닌,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 거울이었다.
지도자로서의 철학과 여정
하석주는 2003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첫 시작은 포항 스틸러스에서의 플레잉 코치였다. 선수로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던 중, 최순호 감독의 제안으로 코치직을 겸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지도자 인생의 첫 발걸음이었다.
이후 그는 경남 FC, 전남 드래곤즈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프로팀의 전술과 선수 관리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특히 전남에서는 수석코치로서 팀의 리빌딩을 주도했고,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1년에는 모교인 아주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학 축구에 발을 들였고, 이듬해에는 다시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직을 맡아 K리그 무대에 복귀했다.
전남 감독 시절, 그는 안용우, 이종호, 김영욱 등 유망주들을 발굴하며 팀의 미래를 설계했다. 당시 팀은 재정적 어려움과 용병 부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석주는 선수들과의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팀을 하나로 묶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기술보다 태도와 책임감을 강조했고, 훈련 중에도 직접 몸을 움직이며 피드백을 제공하는 스타일이었다.
2014년, 가족의 건강과 자녀들의 학업 문제로 인해 전남 감독직을 내려놓고 다시 아주대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프로 감독은 언제든 맡을 수 있지만,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말하며, 지도자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선택했다.
아주대학교에서는 대학 축구의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팀을 강팀으로 유지하며 꾸준한 성과를 냈다. 그는 선수들에게 단순한 기술 훈련을 넘어서 인생의 방향성과 인간적인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멘토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엄원상, 정태욱 등 프로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과도 깊은 유대감을 유지하며, 스승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2023년에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을 맡으며 행정가로서의 역할도 시작했다. 그는 한국 축구의 저변 확대와 인재 육성을 위한 정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도 이어가고 있다.
하석주의 지도자 철학은 “축구는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는 경기장에서의 태도와 행동이 결국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믿으며, 선수들에게 축구를 통해 인생을 배우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승리보다 사람을 키우는 축구를 지향하며,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헌신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