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30일,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난 고종수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주목받았다. 여수서초등학교와 구봉중학교를 거쳐 금호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고교 시절부터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3년 시도대항 축구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했고, 1994년에는 백록기 고교축구대회에서 금호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를 뜻하며,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대담한 플레이와 창의적인 경기 운영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 그리고 ‘고종수 존’의 탄생
1996년, 고종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멤버로 프로에 데뷔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대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로에 진출한 케이스였다. 데뷔 첫 해부터 그는 자로 잰 듯한 패스와 정교한 프리킥, 감각적인 슈팅으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왼발 킥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경기장 아크 정면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찰 경우 높은 확률로 골을 성공시키며, 팬들은 그 지역을 ‘고종수 존’이라 불렀다.
1998년, 그는 본격적으로 리그에서 스타로 자리매김하며 수원의 공격을 이끌었다. 정확한 왼발 프리킥, 탁월한 시야, 창의적인 패스로 "고종수 존"이라는 프리킥 지역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당시 수원 삼성은 고종수를 중심으로 리그의 강자로 부상했고, 그는 K리그와 아시아 무대에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98년에는 K리그 최연소 MVP로 선정되며 안정환, 이동국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며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국가대표로서의 활약과 아쉬움
국가대표팀에서도 고종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97년부터 대표팀에 합류한 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최종 예선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팀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해냈다. 월드컵 본선에서는 부상을 안고 참가해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선수였다. 이후에도 그는 AFC 아시안컵과 국가대표 친선경기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약했으며, A매치 통산 기록은 38경기 출전, 6골이다.
2001년에는 칼스버그컵에서 파라과이를 상대로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AFC 2월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K리그 경기 중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며 2002년 한일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많은 이들이 히딩크 감독에게 ‘게으른 선수’로 낙인 찍혀 탈락했다고 오해했지만, 실제로는 부상으로 인해 회복이 어려웠던 것이 이유였다. 히딩크 감독은 오히려 “대표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종수처럼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의 다재다능함을 높이 평가했다.
솔직하고 인간적인 성격, 그리고 오해들
그의 성격은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회자되곤 했다. 진중하면서도 솔직했고, 동료들과 감독들에게는 자기 의견을 분명히 전달하는 선수였다. 언론과 인터뷰에서 유쾌한 말투로 팬들과 소통했으며, 때론 자신의 부상이나 기량 저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많은 팬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솔직함은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저 아세요?”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건방진 선수’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고, 리니지 게임을 잠깐 즐겼다는 발언이 와전되어 ‘리니지 폐인’이라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2003년에는 일본 J리그 교토 퍼플 상가로 이적했지만, 감독과의 포지션 갈등으로 인해 6개월 만에 방출되었다. 이후 수원 삼성으로 복귀했지만, 부상과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임의탈퇴 공시를 받았다. 2005년에는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지만 발목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2007년에는 대전 시티즌에서 재기를 꿈꾸며 연봉을 백지 위임하는 등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 해 FA컵에서 700여일 만에 복귀전을 치렀고, 837일 만에 골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감동을 안겼다.하지만 2008년에는 대전 구단과의 연봉 협상 갈등, 무단 이탈, 음주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2009년, 31세의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에는 수원 삼성의 트레이너와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고, 2017년에는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순탄치 않았지만, 11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하며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무리하며…
고종수는 단순한 축구인이 아니다. 그는 선수로서의 파괴력, 국가대표로서의 책임감, 감독으로서의 리더십, 그리고 해설가로서의 유쾌함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그의 축구 인생은 승부욕과 인간미, 그리고 팬과의 의리로 가득 차 있다. 수원 삼성 팬들에게 그는 ‘수원의 상징’이었으며, 한국 축구 팬들에게는 90년대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천재 미드필더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잘못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며, 젊은 선수들에게 후회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남겼다. 그의 말은 단지 축구 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인생의 교훈이기도 하다.
지금은 감독직에서 물러나 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한국 축구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고종수, 그는 프로이기에 더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