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역사에서 ‘선구자’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 중 하나가 있다면, 그 이름은 바로 노정윤일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활약했던 그는 단순한 미드필더가 아닌, 한국 축구의 국제화를 이끈 개척자였다. 일본 J리그에 진출한 첫 번째 한국인 선수로서, 그리고 네덜란드 무대를 밟은 몇 안 되는 선수로서, 그의 축구 인생은 도전과 개척의 연속이었다.필자가 노정윤을 처음 본 것은 94년 미국 월드컵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생생한 그의 플레이를 기억하면서 이글을 써 내려 가겠다.
J리그와 유럽진출
그의 프로 데뷔는 다소 파격적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망 선수들이 K리그 드래프트를 통해 국내 프로팀에 입단하던 시절, 노정윤은 이를 거부하고 1993년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했다. 이는 한국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겼고, 반일 감정이 강하던 시기였기에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선택을 실력으로 증명했다.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 중심으로 자리잡았고, 1994년에는 10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J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독일의 전설적인 미드필더 로타어 마테우스를 연상케 했고, 이에 따라 ‘노테우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5년간 활약한 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NAC 브레다로 이적했다. 당시 한국 선수의 유럽 진출은 드문 일이었고, 그는 그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NAC 브레다에서 25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하며 유럽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특히 아약스와의 경기에서 현지 언론으로부터 최고 평점을 받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아약스의 감독이었던 모르텐 올센은 “2년만 젊었어도 영입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유럽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한 네덜란드 생활 중 차량 절도 사건을 겪으며 가족의 안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결국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세레소 오사카에 입단했다. 이곳에서 그는 황선홍과 함께 뛰며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1999년 황선홍이 J리그 득점왕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정윤의 10개의 도움 중 7개가 황선홍에게 연결된 사실이 있다. 이후 그는 아비스파 후쿠오카로 이적하며 일본 무대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2003년, 그는 마침내 K리그에 입성했다. 부산 아이콘스(현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하며 국내 무대에서의 첫 경기를 치렀고, 데뷔전에서 킥오프 23초 만에 골을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4년에는 FA컵 우승에 기여했고, 이후 울산 현대로 이적하여 2005년 K리그 우승, 2006년 슈퍼컵과 A3 챔피언스컵 우승을 함께했다. 울산에서는 주로 교체 멤버로 활약하며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노장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노정윤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대표팀의 중원을 책임지며, 다양한 국제 대회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의 국가대표 경력은 단순한 출전 기록을 넘어, 한국 축구의 국제화와 전술적 진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그의 A매치 데뷔는 1990년 7월 31일, 중국과의 다이너스티컵 경기였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이는 그의 잠재력과 경기 운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후 그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참가하여 동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서의 첫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는 한국 축구가 아시아권에서 경쟁력을 높이던 시기로, 노정윤은 중원에서의 안정적인 플레이로 팀의 중심을 잡았다.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그는 올림픽 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국제 경험을 쌓았다. 이 대회는 그에게 전술적 이해도와 경기 운영 능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A대표팀에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그의 대표 경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 중 하나였다. 그는 당시 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선발되어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대한민국은 이 대회에서 볼리비아와 무승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동점골, 그리고 독일과의 경기에서 선전했지만 아쉽게도 16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노정윤은 중원에서의 활동량과 패스 능력, 그리고 투지 넘치는 수비 가담으로 현지 언론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독일전에서는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맞대결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그는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아쉬운 결과 중 하나로 기록되지만, 노정윤은 여전히 대표팀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조별리그에서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맞붙은 한국은 1무 2패로 탈락했지만, 그는 경기 내내 중원에서의 안정적인 플레이로 팀을 이끌었다. 특히 네덜란드전에서는 유럽 무대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의 압박을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2000년에는 레바논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 참가하여 대한민국의 3위 달성에 기여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경험 많은 미드필더로서 후배들을 이끌며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이란과의 8강전에서는 연장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며 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같은 해 그는 CONCACAF 골드컵에도 참가했다. 이 대회는 한국이 초청국으로 참가한 국제 대회로, 북중미 국가들과의 경기 경험을 쌓는 데 목적이 있었다. 비록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노정윤은 멕시코, 캐나다 등 북미 강호들과의 경기에서 침착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며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그는 대표팀에서 단순한 미드필더가 아니었다. 경기 흐름을 읽고 조율하는 능력, 상대의 압박을 풀어내는 기술, 그리고 공수 전환 시의 위치 선정 능력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플레이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팀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젊은 선수들이 많은 대표팀에서 그는 멘토 역할을 수행하며 팀 분위기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은퇴 그리고 지도자
은퇴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지도자 연수를 받으며 축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고,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다. 골프에도 관심을 가지며 USGTF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그의 중심은 여전히 축구였다. 그는 “가족에게 봉사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축구로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하며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노정윤의 축구 인생은 단순한 선수 경력을 넘어선다. 그는 한국 축구의 국제화, 선수의 권리, 지도자로서의 준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J리그에서의 활약은 이후 한국 선수들의 일본 진출에 기준이 되었고, 그의 연봉은 이후 진출하는 선수들의 협상 기준이 되었다. 그는 단순히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길을 만든 선수였다.
그의 별명 ‘노테우스’는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투지, 기술, 경기 운영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척자의 정신을 상징한다. 한국 축구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노정윤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이름이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한국 축구의 지형을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