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 감독은 한국 축구사에서 빠질 수 없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K리그와 국가대표팀을 넘나들며 확고한 지도력을 선보였던 그는 지금도 많은 축구팬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김호 감독의 1994 미국 월드컵,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의 감독철학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김호 감독과 1994 미국 월드컵, 조직의 미학과 투혼의 축구
1990년대 초반, 한국 축구는 분명 발전하고 있었지만, 월드컵 무대에서는 여전히 ‘승리 없는 팀’이라는 씁쓸한 평가를 받았다. 이전 대회에서 마주한 강호들 앞에선 항상 무너졌고, 국민들은 단순한 출전보다 ‘1승’이라는 상징적 돌파구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호 감독이 1992년 국가대표 지휘봉을 잡았다. 김 감독은 선수 시절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 축구인이었지만, 지도자로서 더 큰 평가를 받았다. 그가 강조한 철학은 명확했다—화려한 개인기가 아니라 “조직력”과 “희생”이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했고, 대표팀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전술적 팀워크로 끌고 갔다.
김호 감독은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던 수비 불안과 중원 분산 문제를 조직적인 포메이션으로 해결하려 했다. 당시에는 3-5-2와 4-4-2 전환이 핵심이었다. 황선홍을 중심으로 한 공격 라인, 하석주의 중거리 슛 능력, 홍명보의 수비 리딩 등 개별 능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서로의 역할을 명확히 하여 전술적으로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김 감독은 선수 선발에서도 원칙주의자였다. 단순한 유명세보다 팀에 충실히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의 전문가’들을 우선했다. 훈련 중에도 선수들의 태도, 집중력, 그리고 전술 이해도를 면밀히 관찰하며 “경기에서 뛰는 선수는 감독의 생각을 구현하는 확장된 존재”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대한민국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과 함께 조 편성되었다. 모두가 쉽지 않은 상대였다. 첫 경기인 스페인전은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명장면 중 하나를 낳았다. 2:0으로 밀리던 상황에서 후반 들어 하석주의 환상적인 왼발 중거리슛이 그물을 흔들었고, 경기 종료 직전 서정원이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2:2 무승부라는 값진 결과를 안았다. 이 경기 후 언론은 김호 감독의 침착한 전술 운영과 선수들의 끈기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인 볼리비아전은 기대만큼 터지지 않았다. 공세를 펼쳤음에도 결정력 부족으로 0:0 무승부에 그쳤고, 마지막 경기인 독일전은 모두가 기억하는 '투혼의 90분'이었다. 독일은 세계 최강이었지만, 한국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3:0으로 끌려가던 경기는 후반 들어 황선홍과 홍명보의 골로 3:2까지 추격했고, 마지막 10분은 압도적이었다. 비록 탈락했지만, 전 세계 언론은 “한국의 후반 공세는 놀라운 저력”이라며 극찬을 보냈다.
김호 감독은 월드컵 이후 큰 칭찬과 아쉬움을 동시에 받았다. 목표했던 1승에는 실패했지만, ‘한국 축구는 더 이상 약체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줬고, 국내 팬들에게도 뜨거운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후반 전술 수정 능력과 선수 기용은 이후 감독들에게 참고 모델이 되었으며, 조직 축구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필자는 그의 지도 철학은 이후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의 시스템 축구와 맞물리며 뿌리 내렸고, 그 밑거름에는 김호 감독의 원칙과 실패에서 얻은 통찰이 분명 있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조자, 김호 감독의 축구 철학
1995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공식 창단을 발표하며 한국 프로축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단지 팀 하나가 생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축구 문화의 탄생이었다. 이 선봉에 선 인물이 김호 감독이었다. 그는 창단과 함께 ‘이기는 팀’이 아닌 ‘존경받는 팀’을 만들고자 했다. 선수단 구성은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고종수, 박건하, 김진우 등 국내 유망주에 더해 바데아 등의 해외 자원까지 균형 있게 영입했다. 단순한 외국인 선수 의존이 아니라, 국내 자원을 키우면서도 글로벌 트렌드에 맞는 팀 컬러를 구현한 것이다.
김호 감독은 수원 삼성에서 ‘속도 + 조직력 + 유기적 전술’이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정착시켰다. 전방에서의 빠른 압박, 중원의 2선 움직임, 수비에서의 빌드업 전개까지 모두 전술적으로 훈련되었다. 특히 고종수와 서정원의 2선 공격은 당시 K리그에서 가장 위협적인 조합이었다. 1998년 FA컵 우승은 이런 전술적 완성도를 입증했다. 이어서 1999년과 2004년에는 K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며 수원 삼성은 창단 10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K리그 대표 명문 구단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팬 문화에서도 김호 감독은 남다른 접근을 했다. 경기 외적인 행사, 팬 사인회, 지역 연계 캠페인 등에도 감독이 직접 참여하며 “축구는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문화”라는 철학을 실현했다.
김호 감독이 수원 삼성에 남긴 것은 단순한 트로피가 아니다. 그는 하나의 구단 시스템을 완성했고, 이를 통해 젊은 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가 발굴한 선수들은 이후 국가대표로 성장했고, 그의 전술적 유산은 후임 감독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 수원 삼성은 오늘날에도 '축구수도'‘축구 브랜드’로 불릴 만큼 팬들에게 사랑받는 팀으로 남아 있고, 이 모든 출발점에는 김호 감독의 철학과 리더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