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상철 선수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올라운더형 선수로 평가받으며, K리그와 J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다. 2002년 FIFA 월드컵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4강 진출에 기여했으며, 해당 월드컵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2013년에는 K리그 출범 30주년을 기념으로 선정된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에 이름을 올렸다. 필자는 이시기에 프로축구경기를 많이 보러 다녔다. 그때의 유상철 선수의 능력치는 우리나라 어떤 선수보다도 위대했다고 볼수 있다. 그때의 유상철 선수를 기억하면서 그의 프로시절과 국가대표의 찬란했던 시절 아쉬었던 그의 지도자 생활을 돌아 보고자 한다.
태극마크를 달고 빛나던 시절
유상철이라는 이름은 한국 축구의 국가대표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선수가 아니라, 국민의 가슴을 뛰게 했던 전설로 남았다. 특히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무대였다.
1994년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한 유상철은 A매치 124경기에 출전해 18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미드필더 혹은 수비수로서 상당한 성과다. 그가 국가대표팀에서 맡았던 포지션은 한두 군데에 그치지 않았다. 미드필더, 윙백, 센터백, 때로는 공격수로까지 활용되며, 멀티 플레이어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유연한 위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기력은 그를 국가대표팀 내에서 ‘전술적 자산’으로 만들었다.
가장 널리 회자되는 순간은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진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그 중심에는 유상철이 있었다. 6월 4일 부산에서 열린 조별리그 첫 경기, 대한민국은 폴란드와 맞붙었는데, 유상철은 후반 9분 결정적인 추가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확정지었다. 그 골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당시 그는 오른발 인사이드 킥으로 강력한 슈팅을 날렸으며, 그 모습은 한국 축구가 세계를 향해 자신감을 갖는 시작이 되었다.
2002년 대회에서 그는 두 골을 기록하고, 강한 체력과 리더십으로 히딩크 감독 체제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팀워크 중심의 전술에서 유상철은 때로는 중원에서 볼 배급을 담당하고, 때로는 박스 앞에서 강한 슈팅으로 위협을 가했으며, 수비 전환 시에는 뒷공간을 케어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말 그대로 ‘풀타임 멀티 선수’였던 셈이다.
그는 국가대표팀 내에서도 선수들 간의 분위기를 조율하고, 언론과 팬들에게도 책임감 있는 발언으로 ‘대표팀의 목소리’로 여겨졌다. 경기 밖에서도 그는 성숙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국민들에게 사랑받았으며, 그의 대표팀 경력은 단순한 숫자와 기록이 아닌, 대한민국 축구의 감동 서사 그 자체였다.
기술과 근성이 빚어낸 황금 커리어의 프로 생활
프로 선수로서 유상철은 거의 모든 축구인의 이상형이었다. 그는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미드필더였고, 동시에 체력·투지·정신력까지 갖춘 선수였다. 특히 K리그와 J리그를 모두 경험하면서 국내외에서 그의 이름은 실력으로 증명되었다.
유상철의 프로 커리어는 1994년 울산 현대에서 시작된다. 그 당시 그는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며 빠른 시야, 강한 중거리 슛, 안정적인 수비로 주목받았다. 특히 1998년 K리그 득점왕을 수상하며 국내 최정상 선수로 도약했고, 이후 일본 J리그로 진출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1999년에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입단했고, 요코하마 시절에도 그의 중거리 슈팅과 박스 투 박스 스타일은 일본 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으며 ‘외국인 선수 베스트 11’에도 포함되는 등 인지도를 얻었다. 이후에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며 일본 무대에서 폭넓은 전술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2002년부터는 다시 울산 현대로 복귀해 선수 커리어 후반부를 이끌었다. 복귀 후에도 그는 여전히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유지했으며, 2005년 K리그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가 지닌 강점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팀 내에서 역할을 재정의하는 유연성이었다. 울산에서 그는 리더십을 통해 젊은 선수들의 롤모델 역할까지 해냈고, 후반기에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센터백 역할까지 소화하면서 팀의 전술 유연성을 높였다.
그가 은퇴하기까지 보여준 프로 의식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선수로서의 유상철은 ‘실력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프로 커리어 내내 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와 책임감 있는 플레이로 K리그 팬들에게 “믿을 수 있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끝까지 책임을 다했던 사령탑
2006년 선수 은퇴 후 유상철은 곧바로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초기에는 울산 현대 유소년 팀과 대학교 팀에서 지도자 수련을 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다듬었고, 2011년에는 대전 시티즌 감독직을 맡으며 K리그 무대에서 본격적인 리더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그는 어려운 팀 사정 속에서도 선수단 분위기 개선과 조직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고, 기초 체력 훈련부터 전술 토대 구축까지 꼼꼼하게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가 중시했던 것은 ‘선수와의 소통’이었다. 무조건적인 지시가 아니라, 선수 각자의 특성과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팀으로 만드는 축구”를 펼쳤다.
그 후에는 전남 드래곤즈, 그리고 울산대학교에서도 지도를 이어갔다. 그에게 있어 지도란, 결과보다는 과정과 성장의 축구를 만드는 일이었다. 2019년에는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맡게 되며 다시 프로 구단의 사령탑으로 복귀한다. 당시 인천은 강등권을 맴돌고 있었고, 분위기 반전이 절실했다.
유상철은 팀 내 커뮤니케이션 강화를 통해 조직력을 높였고, 공격 전개에서의 간결함과 수비 전환 속도를 중심으로 ‘실용 축구’를 제시했다. 인천은 그해 리그 잔류에 성공했으며, 이 성과는 팬들과 언론의 큰 박수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유상철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고, 투병 중에도 지휘봉을 내려놓지 않았다.
암 투병 중에도 그는 선수들과의 관계를 이어갔으며, 팬들에게 “감독이라는 역할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2020년, 유상철은 끝내 병마와 싸우다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리더십, 열정, 책임감은 축구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지도자로서 유상철은 항상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춘 지도법을 고수했고, 유소년부터 프로까지 폭넓은 경험 속에서 축구 철학을 실현했다. 그의 사후에도 팬들과 축구계는 그를 영원한 감독, 영웅, 그리고 축구를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